남일동7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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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역사를 찾아 떠나는 여행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여성들도 나라의 빚을 갚고자 은반지, 은장도를 의연했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여성조직을 만들어 전국 여성운동의 효시가 되었던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2015년 비로소 그녀들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국에서 최초로 여성조직을 결성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여성조직을 이끌고 취지문을 작성했던
정경주의 1926년(당시60세)사진
(후손 서찬주 소장)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취지문
경고 아 부인 동포(警告 我 婦人同胞)라
삼가 우리 부인동포에게 알린다.
우리가 여자의 몸으로 규문(閨門)에 머물러 삼종지의(三從之義)외에 간섭할 일이 없으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자하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금연하고 대전(代錢)을 구취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감동케 할일이요 진정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은 논하지 말라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리오. 본인 등은 여자의 소처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다만 패물 등속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河海)가 가는(細) 물을 가리지 아니하기를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나니 뜻있는 부인 동포들은 많고 적음을 불구하고 혈심의 의연하와 국채를 다 갚게 하는 것이 천만행심(千萬幸甚).
- 정미 정월 십일일 발기인에 대구 동상 남일동
- 정운하 처 김씨 은지환 일 불 한 냥 두 돈중
- 서덕균 처 이씨 은지환 일 불 한 냥 오 돈중
- 정운갑 모 서씨 은지환 일불 두냥중
- 서학균 처 정씨 은지환 일 불 두 냥 중
- 김수원 처 배씨 은연화 일개 두냥 구 돈중
- 서병규 처 정씨 은장도 일 개 두냥중
- 서석균 처 최씨 은지환 일 불 한 냥 오 돈중
-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8일자 기사 -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란?
-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남성 중심으로 펼쳐지던 국채보상운동을 여성의 영역까지 넓힌 동시에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주체로 인정한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의 효시로 기억되고 있음.
- 국채보상운동은 처음엔 담배를 끊는 ‘3개월 단연’을 주된 방법으로 제시해 남성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었지만 ‘부인이라고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여성도 의연금을 내기 시작했음. 여성들이 처음 조직을 만들어 의연금을 낸 것은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이 결성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임.
- 연구 결과,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결성 장소는 남일동 109번지인 것으로 드러남.
- 정경주의 고손자 서헌주는 “당시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호적에는 대정 4년(1915년)에 여농 서병규의 친부 서상우 어른께서 돌아가신 후 대정 11년(1922년)에 남정 109번지에서 봉산정 51-1 번지로 이사를 하셨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07년에는 남정 109 번지가 7부인이 모여 거사를 하였던 남일동의 위치가 아닐까 합니다”라고 증언
- 대정14년(1925년) 토지대장을 확인해보면 남정 109번지 토지 주인이 서병규로 나타남. 이를 통해 패물폐지부인회가 취지문을 작성한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된 곳이 남일동 109번지로 추측할 수 있음. 이 토지대장에 따르면 당시 서병규의 자택은 1,207㎡(366평) 정도 규모임.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
- 남일동의 패물폐지부인회는 전국 여성계의 첫 번째 단체이자 또한 첫 번째 패물의연 단체로, 여기에 자극되어 전국 곳곳에서 유사한 운동이 펼쳐짐.
- 그러나 지금까지 패물폐지부인회 구성원의 이름은 연구되지 않았고, 1907년과 똑같이 취지문에 나타났던 ‘정운갑 모 서씨, 서병규 처 정씨,
정운화 처 김씨, 서학균 처 정씨, 서석균 처 최씨, 서덕균 처 리씨, 김수원 처 배씨’ 로 불리고 있었음 - 2015년 전국 최초로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깃발을 들었던 여성 조직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여성들의 이름을 찾는 연구를 진행한 결과, 7명 중 6명의 이름을 발굴함.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7부인은?
서채봉의 사진.
후손 정우영 소장.
서채봉
- 정운갑 모 서씨는 서채봉(徐彩鳳, 1859-1936). 정봉원의 부인으로, 취지문에는 유일하게 정운갑의 모(母)라는 어머니의 자격으로 등장
- 서채봉의 직계후손 정우영(고손자) 씨에 따르면 “어머니로부터 들은 기억으로는, 이 할머니는 호랑이같은 분이었다. 기개가 대단하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증언
정경주
- 서병규의 처 정씨는 정경주(鄭瓊周, 1866-1945)로, 일부에서 최경주로 잘못 알려진 인물로 이번 연구 과정을 통해 정경주임을 확인
- 정경주는 실질적으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리더이자 취지문을 직접 작성한 장본인으로 추정됨. 서학균, 서석균(서철균), 서덕균이 정경주의 세 아들임을 고려할 때 정경주는 세 며느리들과 함께 뜻을 모아 취지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 정경주의 고손자 서찬주 숙명여대 교수는 “할머니(정경주의 손부)의 말씀에 따르면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자들이 나와서 줄연설을 했다고 한다. 특히 정경주 할머니는 한마디를 해도 호소력있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취지문도 정경주 할머니가 쓰셨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증언
- 정경주의 고손자인 서헌주 미국 버지니아주 목사는 “정경주 할머니는 학식이 많으시고 절세의 미인이시며 봉건사회의 대가족을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거느리신 여장부라고 들었다”면서 “저희 할머니(정경주의 손부) 말씀으로는 정경주 할머니는 성미가 까다로워 모시기 힘든 점도 있었지만 품위와 권위가 있어 진심으로 흠모하였다 한다.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를 보아 남편이 국채보상운동에 투신하여 고군분투하실 때 자부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뛰어든 결정도 이 어른이 하셨을 것 같다”고 증언
- 이로써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7부인의 중심 활동을 했던 여성이 바로 정경주 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드러남.
정경주와 남편 서병규 사진. 뒷면에 '병인원월상한촬영'이라고 적혀있다.
정경주가 60세 되던 1926년 음력 1월 10일경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후손 서찬주 소장 사진
김달준의 사진.
후손 정우영 소장
김달준
- 정운화 처 김씨는 김달준(1877-1956). 정운화는 국채보상운동에서 ‘정운화’로 표기되기도 하고 ‘정운하’로 표기되기도 함.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비에는 ‘정운하’로 표기되어 있는데 당시 이를 보도한 신문들의 표기가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가계도를 바탕으로 찾은 결과 정운화(鄭雲華)가 정확한 이름임을 알 수 있었음.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
- 정경주의 세 며느리는 정말경, 최실경, 이덕수.
- 정경주는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서학균의 처 정씨가 정말경(鄭末慶, 1881-1932), 2남 서석균(철균)의 처 최씨가 최실경(崔實慶, 1888-1965), 3남 서덕균의 처 이씨가 이덕수(李德秀, 1889-1955)임.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이름 발굴의 의의
- 남일동의 패물폐지부인회는 전국 여성계의 첫 번째 단체이자 또한 첫 번째 패물의연 단체였지만 지금까지 역사 속에 묻혀 있었음. 이름을 발굴한 것을 통해 당시 여성들의 활약상을 조명할 수 있었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만 불렸던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찾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여성의 역사를 현대로 불러내 가리워졌던 ‘대구여성사’를 복원하는 작업임.
향후 정책 과제
현재 진골목 일대에 그려진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벽화
내용문의
대구광역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 연구위원 최세정 sky@daegu.pass.or.kr (053-210-5652)